중국과 유럽연합(EU) 사이의 반도체 공급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상무부가 넥스페리아(Nexperia) 중국 공장에서 생산한 민간용 반도체의 수출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로 하면서, 장기간 이어졌던 유럽-중국 간 기술갈등이 완화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조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미중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로 평가됩니다.
중국, 넥스페리아 반도체 ‘부분 수출 허용’ 선언
AFP통신과 EU 집행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는 넥스페리아의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민간용 반도체에 한해 수출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지난 9월 네덜란드 정부가 중국 모회사인 윙테크(Wingtech)의 기술 유출 우려를 이유로 넥스페리아의 경영권을 박탈한 이후 처음으로 양측이 완화 조치를 취한 사례입니다.
EU 무역·경제안보 담당 집행위원인 마로시 세프초비치는 이날 엑스(X·구 트위터)를 통해 “EU 및 글로벌 고객을 대상으로 한 넥스페리아 칩 수출 절차가 간소화된 것을 환영한다”며 “이번 조치는 즉시 발효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그는 “민간용 반도체에 한정된 조치이며, 군사·이중용도 제품은 여전히 제한된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로써 넥스페리아 중국 공장은 한동안 멈춰 있던 수출 라인을 다시 가동하게 됐습니다. EU와 중국 양측은 이번 조치를 통해 ‘완전한 반도체 흐름 회복’을 위한 지속적인 협의 채널을 열어두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중국의 대응 논리와 ‘네덜란드 책임론’
중국 상무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혼란의 근원은 네덜란드 측에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상무부는 “유럽이 네덜란드 측을 설득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점을 주목하며, 네덜란드가 관련 조치를 조속히 철회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중국은 이어 “민간용 반도체의 합법적 수출은 이미 면제 조치 대상으로 시행 중”이라며 “유럽이 네덜란드에 지속적으로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중국이 ‘실질적 조치’를 취했다는 점을 부각하면서, 글로벌 시장에 안정 신호를 보내려는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동시에 중국은 이번 사안을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일부로 간주하며 ‘서방 공조 견제’의 메시지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발언은 중국이 최근 들어 보여주고 있는 외교·통상 전략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즉, 실무적 협상에서는 EU와의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미국과 동맹국(네덜란드 포함)에 대한 정치적 압박은 유지하는 ‘이중 트랙’ 접근입니다.
넥스페리아 사태의 배경과 미중 기술전쟁의 연장선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으로, 2019년 중국 윙테크가 인수했습니다. 이후 미중 기술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서방 진영은 중국 자본이 서방의 핵심 반도체 기술을 흡수할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지난 9월 네덜란드 정부는 ‘기술 이전 위험’을 이유로 넥스페리아의 경영권을 박탈했습니다.
이에 중국 상무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습니다. 넥스페리아의 중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수출을 전면 금지하며, EU 시장으로 향하던 패키징 반도체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넥스페리아 네덜란드 본사는 이에 반발해 중국 공장으로의 웨이퍼 공급을 끊었고, 양측은 사실상 ‘공급망 단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달 30일 부산에서 열린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미중 정상회담에서 ‘공급망 안정화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넥스페리아의 중국 공장 반도체 출하가 재개되면서, 이번 수출 허용 조치가 공식화된 것입니다.
EU의 환영과 향후 과제
EU 측은 이번 조치를 즉각 환영했습니다. 세프초비치 집행위원은 “넥스페리아 칩 수출이 원활히 이루어지면 유럽 내 자동차 및 전자 부품 공급 안정성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법적·정치적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기업들이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즉, 이번 조치는 갈등의 ‘일시적 완화’에 불과하며, 근본적인 신뢰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네덜란드 정부가 향후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EU-중국 간 공급망 협력이 지속될지, 다시 긴장 국면으로 돌아갈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기술 패권 속 ‘부분 해빙’, 그러나 완전한 신뢰는 아직
넥스페리아 사태는 단순한 기업 이슈가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정치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중국의 수출 허용은 단기적으로는 공급 불안을 완화하지만, 기술 주권과 안보를 둘러싼 구조적 대립은 여전합니다. 미국과 EU가 추진 중인 공급망 다변화 정책, 그리고 중국의 자급률 확대 전략이 평행선을 그리는 한 완전한 신뢰 회복은 요원합니다.
결국 이번 조치는 ‘협력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중국은 외교적으로 실리를 확보했고, EU는 공급망 안정을 얻었지만, 네덜란드의 기술 규제 완화 없이는 지속 가능한 복원력(resilience)을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글로벌 반도체 질서가 다시 균형을 찾기까지는 여전히 정치적 변수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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